역사와 인문

  • 고정의 제산 , 인문의 매력으로 이름을 떨쳤다
    남송 때에 고정산 서남쪽의 중턱에다 운금(云錦)정을 지었고, 영종황제가 “고정산”이라고 어서를 하사하였는데 지금 편액으로 걸려 있다.황학산은 전해진 바에 의하면 선인 왕자안은 학을 타고 이 산을 지났다고 하여 이름을 붙었다. 황학봉은 명대 예부상서 주국정의 <용당소품>의 기록에 따르면 이름이 봉하주란 한 노인은 노자의 석상을 얻더니, 홀연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때 마침 소나무가 꽃이 활짝 피고 있어서, 날아온 학들을 황색으로 물들여 이 이름을 붙여지었다고 한다.황학산은 황학루가 있어서 황학산루라고도 한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황학 선생에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이름은 선고, 산북의 꼭대기에다 작은 집을 지어 살았다고 한다. 동공산은 기록에 의하면 동진효무제 때 산안에서 붕괴된 바위가 두드려도 소리가 안 나니 장화에게

  • 상탕운하는 멀고 오래다.
    고정산 남쪽에서는 상당강 (운하의 한 부분) 이 전경을 뚫고 흘러간다. 그의 역사는 춘추시기 (즉 오고수도) 로까지 거슬러 올라갈만큼 항주시 지역에서 역사서에 기재된 첫 인공으로 소통된 수로다.진시황은 순시하던 길에 상당하를 거쳐 항주에 들어왔을 때에 고정산 남쪽 기슭 앞에 있는 소호(조식호)에 잠시 머물었다가 전당현(현 항주)에 도착한 후에 전당강을 건너서 대우(大禹) 황제의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 회계산으로 향했다.남송조정은 임안 (즉 항주)의 상당하에서 진강구까지의 운하를 당시의 가장 중요한 물류 조로로 삼았다. 당시의 말로는 “임안에서 경구 (진강)까지의 천리 길로, 배나 차가 붐비며 우편물도 끊임없이 오가며, 군사의 정보까지 이를 통해 전해지고 그 누구라도 다닐 수밖에 없었던 통로였다. 적안(赤岸)역에는 선박을 배

  • 고대 선민들이 산을 의지하여 거주하였다
    고정산 서남 (금반산 마을) 의 수전판 유적지가 50년대 말기에 두 차례에 걸쳐 발굴 작업을 했는데 4,5천년 전 신석기 시대에 항주의 선민들은 이곳에서 반혈거(굴에서 삶)로 원시 농업과 어업 생활에 종사하면서 살았는데 이미 광범위하게 수상교통을 채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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